늦가을 하얀 씨앗이 바람에 날리는 풍경! 박주가리

시골길을 걷다 보면 낡은 담벼락이나 오래된 울타리를 은밀하게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을 만나곤 합니다. 무심코 스치면 그저 흔한 풀잎처럼 보이지만, 계절이 깊어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면 이 작은 덩굴은 전혀 다른 마법 같은 풍경을 선사합니다. 여름의 소박한 숨결을 지나 가을바람에 하얀 날개를 실어 보내는 식물, 바로 ‘박주가리’의 이야기입니다.

박주가리는 여름에는 꽃, 가을에는 열매 그리고 하얀 날개를 펴고 먼 여행을 떠나갑니다.



담벼락을 수놓는 소박한 하트의 박주가리

    박주가리는 초록빛 덩굴이 양지바른 길가나 밭두렁을 따라 24m 남짓 유연하게 뻗어 나갑니다. 가까이 다가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싱그러운 하트 모양의 잎입니다. 끝이 뾰족하고 매끄러운 잎사귀 사이로, 여름날 78월이면 별 모양을 닮은 연보라빛 혹은 흰빛의 작은 꽃들이 소곤소곤 모여 핍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잎 안쪽에 보송보송한 털이 촘촘히 나 있어 묘한 신비감을 자아냅니다. 재미있게도 줄기나 잎을 살짝 꺾으면 우유처럼 하얀 유액이 또르르 흘러나오는데, 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식물만의 여린 갑옷이자 비밀스러운 장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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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선물: 겉모습은 투박해도 속은 찬란한 열매

      박주가리의 진짜 매력은 꽃이 지고 난 뒤, 본격적인 가을부터 피어납니다. 화려했던 자리가 지고 나면 6~10cm 정도의 길쭉하고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진 열매가 맺힙니다. 매끄럽지 않고 거칠어 보이는 이 초록빛 주머니는 시간이 흐를수록 햇살을 받아 단단하게 익어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껍질이 세로로 툭 갈라지는 순간 놀라운 장관이 펼쳐집니다.
      주머니 속에 꼭꼭 숨어 있던 수많은 씨앗들이 저마다 하얀 명주실 같은 털(관모)을 달고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입니다. 마치 작은 낙하산처럼 바람을 기다리던 씨앗들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시공간을 향해 가볍게 몸을 던집니다.

      그래서일까요? 박주가리의 꽃말은 ‘먼 여행’입니다. 늦가을, 잎이 모두 떨어진 앙증맞은 담벼락에 홀로 남은 열매 껍질과,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흩날리는 하얀 솜털의 무리는 민들레 홀씨와는 또 다른 깊은 운치를 남깁니다.


      自然의 섭리: 꽃보다 아름다운 ‘마지막 안녕’

        예로부터 박주가리의 어린순은 허기를 달래는 나물이 되기도 했고, 줄기를 자르면 나오는 하얀 진액이나 말린 열매(나마자)는 전통 한방에서 귀한 약재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식물이 품은 미지의 독성처럼, 인간에게 쉽게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는 도도함마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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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에는 싱그러운 하트 잎으로 눈을 즐겁게 하고, 가을에는 울퉁불퉁한 품 안에서 하얀 날개를 길러내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떠나보내는 일생. 땅에 뿌리를 박고 담벼락을 오르며 묵묵히 살아온 박주가리의 계절을 바라보노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꽃이 피는 순간보다, 자신의 전부였던 씨앗들을 먼 여행으로 떠나보내는 저 늦가을의 풍경이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올가을,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 문득 멈춰 서게 된다면 담벼락 위에서 바람을 기다리는 박주가리의 따뜻한 하얀 날개들을 조용히 눈여겨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