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전 영화나 문학 작품을 보면, 귀족이나 신사들이 아늑한 실내에서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주사위를 던지는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체스와는 또 다른 결의 긴장감이 감도는 이 게임의 정체는 바로 백개먼(Backgammon)입니다.
체스나 바둑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규칙을 일일이 외울 필요는 없지만, 주사위의 운과 플레이어의 날카로운 판단력이 절묘하게 맞물리는 독특한 2인용 보드게임이지요. 무엇보다 이 게임은 단순히 몇백 년 된 오락이 아니라,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엄청난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백개먼은 과연 어떤 보드게임일까?
백개먼은 흔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드게임 중 하나”로 불립니다. 물론 5,000년 전 고대인들이 오늘날과 똑같은 규칙으로 즐겼던 것은 아닙니다.기원전 2600~24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적에서 발굴된 ‘우르의 왕실 게임(Royal Game of Ur)’이 대표적입니다.
주사위를 굴려 말을 이동시키는 이 고대 경주형 보드게임은 현대 백개먼의 직조 조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임의 기본 뼈대는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 인원: 2명
- 구성: 각자 말 15개씩 + 주사위 2개 + 24개의 포인트(삼각형 칸) + 바(Bar, 중앙 칸막이)
- 목표: 내 말 15개를 가장 먼저 판 밖으로 모두 빼내는 사람이 승리!
- 핵심 재미: 주사위의 운 + 판세를 뒤집는 전략적 선택, 그리고 상대의 말을 잡아 ‘바’로 보내는 방해 작전
한눈에 보는 플레이 사이클
주사위 굴리기→ 나온 숫자만큼 말 이동→ 상대 말을 잡거나 내 말 안전하게 보호→ 15개의 말을 모두 홈으로 모아 탈출시키기!
처음에는 삼각형이 가득한 판 모양이 낯설 수 있지만, 몇 번 직접 해보면 “어느 말을 움직일까?”
“상대의 길목을 틀어막을까?”
“위험을 감수하고 공격할까?”를 고민하는 짜릿한 묘미에 금방 빠져들게 됩니다.
생각보다 훨씬 간단한 실전 게임 방법
백개먼은 규칙이 직관적이어서 누구나 금방 익힐 수 있습니다.
1). 시작 배치: 두 사람이 각각 15개의 말을 정해진 위치에 올리고,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말을 이동시킵니다.
2). 주사위 이동: 주사위 두 개를 굴려 나온 숫자만큼 말을 움직입니다.
(예: 3과 5가 나왔다면 한 말을 3칸, 다른 말을 5칸 이동하거나, 한 말을 3칸 후 5칸 이동하는 등 자유롭게 조합 가능합니다.) 단, 상대방 말이 2개 이상 모여 있는 칸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3). 상대 말 잡기: 상대의 말이 혼자 놓여 있는 칸에 내 말이 도착하면 그 말을 잡아서 판 가운데의 ‘바(Bar)’로 보낼 수 있습니다. 바에 잡힌 말은 게임판 안으로 다시 재입장하기 전까지 다른 말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게임의 흐름이 단숨에 뒤바뀝니다.
4). 탈출(Bear off): 말을 한 바퀴 돌려 내 ‘홈 영역’에 모두 모은 뒤, 주사위 숫자에 맞춰 하나씩 판 밖으로 빼내면 최종 승리합니다.
운이 8할? 아니요, 철저한 ‘전략 보드게임’입니다
“주사위 게임이니까 운이 전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체스처럼 주사위가 전혀 없는 게임이라면 실력 차이가 그대로 결과로 이어지겠지만, 백개먼은 불리한 주사위 속에서도 판세를 뒤집는 묘미가 있습니다.
같은 3과 5가 나와도 어떤 말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선택지가 열립니다.
공격적으로 상대의 말을 잡을 것인가?
내 말을 안전하게 겹쳐 방어할 것인가?
상대의 이동 경로를 완벽히 틀어막을 벽을 세울 것인가?
이처럼 백개먼은 확률 계산, 위기 관리, 공격과 방어, 그리고 공간 장악이 동시에 맞물리는 고도의 두뇌 싸움입니다.
여기에 현대 백개먼에서는 판의 가치를 두 배로 키우는 ‘더블링 큐브(Doubling Cube)’까지 더해져, 단순한 주사위 오락을 넘어 아슬아슬한 심리전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서양 문학 속 거장들도 사랑한 백개먼
백개먼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오랜 세월 동안 서양의 일상 문화 깊숙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찰스 디킨스의 고전 소설 《두 도시 이야기》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로리 씨가 불안을 안고 집에 돌아와 마네트 박사와 함께 조용히 백개먼 판을 펼칩니다. 실내의 평화로운 게임 풍경과, 창밖에서 점점 거세지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가 극적으로 대비되며 소설의 긴장감을 한층 끌어올리는 명장면이지요.
또한 그의 다른 작품인 《돔비와 아들》에서도 백개먼을 잘 두는 인물이 등장하며, 당시 영국 상류사회에서 백개먼이 얼마나 친숙한 오락이었는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다시 마주한 백개먼은 요즘 보드게임과는 또 다른 결의 묘한 매력을 줍니다.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무거운 체스도 아니고, 단순히 운에만 기대는 지루한 주사위 놀이도 아닙니다. 주사위가 운명을 던져주지만, 그 운명을 어떻게 요리할지는 온전히 플레이어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가죽이나 나무로 된 케이스를 펼치면 안쪽에 펼쳐지는 삼각형 칸들, 그리고 두 사람이 주사위를 가만히 굴리며 조용히 말을 옮기는 모습. 수천 년 전 고대 페르시아의 살롱부터 유럽의 카페, 그리고 영화와 문학 속을 거쳐 오늘날 우리의 손끝까지 이어져 온 서양의 오랜 생활문화를 고스란히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혹시 백개먼을 실제로 플레이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이번 기회에 규칙을 처음 접해보시는 건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