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의 팔공산 동쪽 골짜기, 그 깊은 품 안에는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고찰 은해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은빛 바다처럼 넓고 깊은 사찰’이라는 이름처럼, 은해사는 넉넉하고 고요한 기운을 지니고 있어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가기 참 좋은 곳입니다. 그 중에서도 은해사에서 중앙암(돌구멍절)까지 이어지는 산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과 시원한 계곡을 따라 걷는 길로 휴일이면 자주 찾는 곳입니다. 오늘은 이 길을 따라 인종태실, 백흥암, 삼인암, 만년송, 극락굴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중앙암까지 천천히 걸으며 만난 풍경과 이야기를 적어볼까 합니다.

영천가볼만한곳 은해사
은해사는 809년 통일신라 헌덕왕 때 도의국사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서 팔공산 곳곳에 여러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불교문화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5분 정도만 걸으면 일주문을 지나면 고즈넉한 금포정이 반겨줍니다. 곧게 뻗은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금포정을 지나면 은해사 보화루가 나오고, 경내에는 대웅전, 명부전, 보광전 등 전통 양식의 전각들이 정갈하게 자리하고 있어 잠시 들러 둘러보는 것도 좋습니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성보박물관에 들러 불교 미술의 아름다움을 감상해보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인종태실, 고즈넉한 역사의 숨결
은해사를 지나 20분쯤 걸으면 커다란 연못 치일지가 나오는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왼쪽은 백흥암, 직진은 운부암 방향이며, 그 사이의 가파른 오르막 산길로 향하면 인종태실로 가는 길입니다. 30분가량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정상의 양지바른 곳에 고요하게 놓인 인종태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조선 12대 임금이었던 인종의 태가 봉안된 곳으로,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석조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지만 왕실의 오랜 역사가 담긴 의미 깊은 장소입니다. 주변으로는 굴참나무와 소나무가 빽빽이 둘러싸고 있어 경건하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 잠시 머물러 명상하기에 더없이 좋습니다.
팔공산 중앙암(돌구멍절)과 삼인암
인종태실에서 다시 숲길을 따라 20여 분을 걸으면 백흥암 갈림길이 나오고, 여기서 다시 40분 정도를 걸으면 데크 계단이 시작됩니다. 계단을 모두 오르고 나면 커다란 바위들이 흩어져 있고, 그 중 세 개의 넓적한 바위가 줄지어 있는 곳이 삼인암입니다. 위험한 절벽이지만 탁트인 조망에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천연 쉼터입니다. 3-5명 정도가 바위 위에 앉아 간식을 먹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제격이고, 가끔 중앙암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가 바위틈 사이로 퍼진다면 이 공간을 더 깊은 명상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삼인암에서 일어서면 만년송이라는 소박한 팻말이 보입니다. 좁은 바위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붙잡습니다. 처음엔 평범해 보였지만, ‘만년송’이라는 이름표를 보고 나면 기묘하게 휘어진 가지와 윤기 나는 줄기에서 오랜 세월을 견뎌온 기상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극락굴과 중앙암(돌구멍절)로 내려갑니다. 만녕송에서 밖으로 나오면 중암암 이정표를 따라 바위틈을 따라 내려가면 십자 모양의 좁고 어두운 동굴이 나타납니다. 마른 체격이라면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도전은 동굴을 들어서기 전의 어두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일지도 모릅니다. 용기가 없는 저는 한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습니다. 극락굴 입구에서 내려서면 삼층석탑이 있고, 삼층석탑에서 계단을 모두 내려가면 좌측으로 두 개의 바위가 어깨동무한 듯 서 있고, 그 사이를 지나면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인 중앙암의 법당이 보입니다.
작은 절집 하나가 이렇게 절묘하고 포근한 자리에 있을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마루에 앉아 건너편 능선을 바라보며 5월의 햇살을 맞으니 마음속 번잡함이 스르르 녹아내립니다. 몸에서 한기가 느껴질 만큼 모든 걸 내려놓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은해사로
중앙암을 떠나 내려가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차량이 다니는 임도를 따라 내려갈 수도 있지만, 다시 삼은암을 지나 산길을 통해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30분 정도 부드러운 내리막을 따라가면 대나무 숲이 잠깐 나타나고, 이윽고 백흥암의 조용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백흥암은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일반인 출입은 제한되지만, 외관만으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단청 없는 절집의 소박한 아름다움, 바람에 실려오는 비구니 스님의 염불 소리는 이곳이 단지 사찰이 아닌 수행의 공간임을 말해줍니다.
백흥암을 지나 임도를 따라 30여 분을 더 걸으면 다시 은해사 주차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총 4시간 남짓 걸렸습니다. 주차장 옆 식당가에 들러 가볍게 잔치국수와 파전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며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은해사에서 시작해 인종태실, 삼인암, 만년송,그리고 중앙암과 백흥암까지 둘러본 길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라, 역사와 자연, 나 자신을 마주하고 비우는 길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마음 한구석이 비워지고 따뜻해진 느낌과 함께 다시 내일 할 일을 정리해봅니다.